글나눔조현병 어머니처럼 되기 싫어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다

기독정신과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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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neosherlock.com/archives/17936

당신 곁의 ‘1%’

“조현병 어머니처럼 되기 싫어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다”

주보배 기자 
2022.12.15

그 벽 앞에서 32년 차 정신과 전문의는 잠시 말을 삼켰다.

“하루를 즐기러 간 젊은이들에겐 아무 죄가 없습니다”

“친구야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해”

벽에는 슬픔과 그리움을 가득 품은 작은 네모 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옷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치는 나와는 달리 이영렬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 센터장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disaster’는 ‘별을 잃었다’는 의미예요. 옛날에 별은 방향을 알려주는 존재였잖아요. 재난은 방향이 사라진 혼란의 상태라는 거죠.”

이영렬 센터장은 재난 심리지원 전문가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17년 포항 지진, 2019년 안인득 사건 등의 현장에서 피해자 및 유가족 마음을 돌봤다.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포항에 사는 그가 서울 이태원역에서 만나자고 했던 이유도 이태원 참사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32년 차 정신과 전문의‘, ‘재난 심리지원 전문가’ 외에 그를 설명하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다. 바로 ‘조현병 환자의 가족‘이다.

“저는 어머니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되기 싫어서 정신과 전문의가 됐어요.”

이영렬 센터장은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가 보건복지부 예산을 받아 제작한 영화 <F20, 그 이후>를 기획했다. 영화는 탐사보도 매체 기자인 주인공 ‘이보미‘가 진주 방화·살인 사건을 취재하면서 조현병 환자인 아빠 ‘영철‘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렸다. 진주 방화·살인 사건은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 조현병 환자 안인득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아파트 주민을 칼로 찌른 사건. 영화의 주인공 이보미 역할은 내가, 아빠 영철 역할은 이영렬 센터장이 직접 연기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떤 의미일까. 조현병 환자 가족들을 위한 영화를 기획하고 직접 연기까지 나선 원동력은 무엇일까.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들이 ‘삶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겨울바람이 세게 불었던 지난 7일 서울 이태원동 이태원역 인근에서 이영렬 센터장을 만났다.

이영렬 센터장이 이태원역 참사 현장에 서 있다. ⓒ셜록

세 살짜리 아이가 오래된 저택 마루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이는 문틈으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엄마를 본다. 엄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곧 눈이 마주친다. 아이는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자전거 운전대를 튼다.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바퀴를 굴린다.

“피한 거죠.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 곁에 갈 수 없다는 거.”

두 해가 지나고 다섯 살이 됐을 때 아이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당시(1960년대)에는 행려(行旅) 정신질환자가 많았어요. 길에 돌아다니는 정신질환자요. 한 번은 그 환자들을 쫓아내는 동네 애들 행렬에 저도 꼈는데, 그때 처음 안 거예요. 애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하는 짓이 우리 엄마랑 똑같다는 걸요.”

‘우리 엄마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깨달은 아이는 어떤 심정을 느꼈을까.

영화 <F20, 그 이후>에서 주인공 이보미는 아빠의 생존본능을 혐오한다.

#씬12

이보미 : 제 친구 얘긴데요. 친구는 곁에 있는 사람이 너무 생존본능이 강한 것이 자꾸 신경 쓰인대요. 근데 그 친구 지인도 살아야 하는 거 맞잖아요. 근데 그게 꼴 보기 싫대요.

이영렬 센터장이 주인공 이보미에 투영한 건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사실 제 얘기죠. 보미가 아버지의 생존본능을 혐오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살고 싶어서‘예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정신질환에 걸렸단 걸 알고 처음 한 생각은 ‘우리 엄마 불쌍해!‘가 아니었어요. ‘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였어요.”

영화 속 보미의 엄마는 조현병 환자인 남편을 끝까지 책임졌다. 이영렬 센터장의 어머니를 돌봤던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보려고 진급도 포기하셨어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살림도 하셨죠. 동생들 똥기저귀까지 다 빠셨어요. 그때는 요강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어머님이 어떤 때는 바닥에 실례를 하셨어요. 아버지가 없을 땐 제가 어머니 대소변을 치웠던 기억이 나요.”

어린 시절에 친한 친구가 없었다. 집에 데려올 수 없었으니까.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지각하는 일도 잦았다.

“제가 유괴당할까 봐 걱정된다고 안 보내기도 하셨고요. 어머니가 시킨 일을 해야 해서 못 가거나 지각한 적도 많았죠. 예를 들어 어머니에겐 오염 망상이 심했는데, 누가 집에 왔다 가면 현관문이 더러워졌다는 거예요. 제가 걸레를 빨아서 어머니가 ‘됐다‘고 할 때까지 닦았어요. 그렇게 안 하면 ‘너도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고 막 때리려고 하셨어요. 실제로 그러기도 하셨죠. 뭐로 맞았는지 기억납니다. 주로 옷걸이랑 빗자루였어요.”

엄마는 때린 뒤에 정신이 돌아오면 아이를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다. 아이도 엄마 등을 움켜쥐고 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기에 이런 문장을 썼다. “나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다.” 일기장을 검사한 선생님은 아이에게 계모가 있다고 오해했다.

“어머니가 정신질환자라고 선생님께 말을 못 했어요. 그냥 듣고만 있었죠, 뭐(웃음).”

이영렬 센터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말할 때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라면서도 껄껄 웃었다. ⓒ셜록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성적이 높은 우등생만 모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이는 공부를 잘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한단 점이었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치열한 경쟁 사회는 차가웠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 잘한다‘는 자존감 하나로 버텨온 삶에 균열이 가자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이 묘하게 달랐다. 창밖을 내다보면 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사람들이 보였다. 수학 시간에 명제를 배울 때 간단한 인과관계조차 이해되질 않았다. 조현병과 정상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정신증 고위험군(high-risk psychosis) 증상이었다.

“이때가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큰 충격을 받았던 때입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가 아프단 걸 깨달은 다섯 살 때였고, 그리고 ‘아 이제 내가 어머니처럼 될 수 있겠구나‘라는 걸 깨달은 고등학교 때. ‘와 정말 큰일 났다. 나 어떡하냐?’ 했죠.”

그렇다고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 증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엇을 했을 때 증상이 완화됐는지도 파악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하니 나아짐.”

“파스텔 색감의 인상주의파 그림을 보면 나아짐.”

 “돌이켜보니, 정신과에서 말하는 일종의 인지치료, 환경치료 같은 걸 혼자서 한 거예요.”

이영렬 센터장은 1981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인천에 있는 A 정신병원에서 1994년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대학병원을 벗어나 정신병원 폐쇄병동의 현실을 마주한 건 바로 이때다.

“그 해 심한 가뭄이 들어서 상당히 더웠어요. 그런데 병동엔 에어컨도 없고, 환자들 탈출을 막으려고 창문도 작았어요. 환자들이 일사병에 걸려서 픽픽 쓰러졌죠. 환경만 문제인 건 아니었어요. 환자를 길들인다고 심할 땐 때리는 일도 있고, 며칠씩 보호실에 묶어뒀어요. 화장실에 못 간 환자가 ‘실례’ 할 때까지요. 이런 광경을 보고 생각했죠. ‘아 나 여기 못 다닌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A 정신병원을 그만두고 서울에 있는 국립 정신병원에서 근무하게 됐다. 월급의 1/3 정도가 줄었지만, 마음은 훨씬 편했다. 병동에 에어컨도 있고, 환자들은 고기반찬을 먹었다. 환자들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도 훨씬 나았다. 그러는 사이 목표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레지던트로 일할 때만 해도 조현병을 잘 치료하는 좋은 임상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A 정신병원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알아보니까 병을 잘 고치는 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병원 시스템 개선, 정신건강에 관한 법과 제도 마련,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같은 것들이 맞물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마디로 중증 정신질환자가 낫거나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단 걸 안 거예요. 이런 일에 관여하려면 계속 국립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공중보건 쪽을 공부하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 대학 교수직을 거절했어요.”

이영렬 센터장은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들이 직접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셜록

그는 2020년부터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공보이사로 활동했다.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는 조현병처럼 중증 정신질환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운 정신질환자의 가족이 만든 비영리 단체다.

“제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은 건 어머니로부터 더 이상 위협받지 않게 된 뒤였어요. 자・타해 위험이 높은 환자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떠맡는 게 누구죠? 현재는 가족입니다. 가족들도 환자로부터 안전한 사회가 돼야 합니다.

이런 사회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 정신건강복지법에 명시된 보호의무자제도가 바뀌는 거예요. 환자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만 맡겨놓은 상황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단 겁니다. 환자를 둔 가족으로 둔 분들이 ‘내가 잘못 키워서 자식이 이렇게 된 거다‘, ‘이건 내 팔자다’ 하면서 감정에 갇혀 있지 말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국가 시스템이 하나둘씩 변할 수 있습니다.”

그가 속한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는 2019년 진주 방화·살인 사건의 피해자 및 유가족들의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돕고 있다. 이영렬 센터장은 지난 11월, 안인득이 응급입원 혹은 행정입원 대상이었다는 내용의 증언을 재판부에 서면으로 제출했다.

“안인득 같은 환자는 입원돼야 했던 게 맞아요. 정신건강복지법에 자・타해 위험성이 높은 환자를 발견하면 경찰 혹은 지자체가 비자의 입원을 진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잖아요. 제가 국립 정신병원장일 때 비자의(非自意) 입원 정당성을 사후에 심의하는 입원적합성심의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안인득은 심의위원회에서도 입원의 정당성을 인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어요.”

물론 그가 입원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안인득의 경우처럼 자・타해 위험도가 매우 높지 않으면 입원은 지양해야 해요. 최근 의학계에선 환자를 위해 수술보다는 내시경 등 비수술 치료를 먼저 고려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래야 출혈이나 통증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치료에서 비자의 입원은 곧 수술입니다. 입원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에선 피가 납니다. 물론 다른 제도가 뒷받침돼야겠지만 앞으로 정신과에서도 비입원치료가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합니다.”

지난 11월 19일,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연기 연습을 하고 있는 이영렬 센터장(오른쪽). 왼쪽에서 연기 시범을 보이고 있는 양수진 감독은 그의 오랜 친구다.

영화 <F20>을 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영렬 센터장의 눈썹은 치켜 올라갔다.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지난해 KBS가 제작한 영화 <F20>은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을 극단적인 범죄자로 그렸다는 장애인 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이영렬 센터장이 기획한 영화 <F20, 그 이후>는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을 바라보는 기존 미디어의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뗀 첫걸음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그랬어요. ‘요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다 나오냐?’ 제작진의 의도는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고 싶었다는데, 의도가 옳았다고 해서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됐는데도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F20, 그 이후> 대본 초안을 직접 쓴 이영렬 센터장에게 ‘가장 중요한 대사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장면을 뽑았다.

#씬15

이보미 : 아빠, 아빠는… 오래 살고 싶어?
이영철 : 어, 뭐… 아무래도 오래 사는 게 좋겠지.
이보미 : (영철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음, 그럼… 나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이영철 : (보미의 말에 급히 반응하며) 아유, 그야 당연하지! 너는 거 오래 살아야지!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야지!
이보미 :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나도 오래 살게. 아주 오래오래… (잠시 침묵) 우리 같이 오래 살자!

“이 장면을 쓰면서 조현병 환자의 가족도 안심하고 오래 살 수 있는 나라가 오길 바랐어요. 그러려면 여러 제도가 필요해요. 우선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주장대로 우리도 미국의 ‘적극적 지역사회 치료 시스템(ACT)‘을 모방한 정책을 도입해야 합니다.

미국에선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있는 전문의,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팀을 이뤄서 한 팀당 100명 정도의 환자를 돌봅니다. 직접 가정에 방문해서 약도 챙겨주고 퇴원 계획도 세워요. 가장 놀라운 건 그 팀에 꼭 한 명은 회복된 정신질환자 즉 당사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철저히 당사자 입장에서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에요.”

인터뷰 내내 그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그가 지금처럼 웃게 되기까진 그의 삶엔 무수한 증오와 분노, 원망이 지났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방긋 웃었다.

“증오, 원망, 사랑, 측은함・・・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느낀 복잡한 감정을 영화에 담으려 했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네요(웃음). 제 언어 능력은 어머니께 받은 게 많아요. 어머님이 말씀을 참 잘하세요. 얼마 전엔 제가 다녀가면 먹을 게 많아진다는 걸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야 영렬이 네가 왔다 가면 냉장고가 방긋방긋 웃는다’.”

 

주보배 기자 treasur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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